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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님] 첫만남 - 콜과 인퀴지터


날이 저물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발 로이어는 한낮의 번화함과는 다른 느낌이 났다. 어쩐지 조금 쓸쓸하구나, 소년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돌아가야 해.

가느다란 팔로 겨우 끌어안은 짐은 소년의 작은 체구에 비해 많이 무거워 보였지만, 그것은 온전히 동행자 하나 없는 소년의 몫이었다. 끙차, 작게 소리 내며 짐을 양팔로 치켜 들자 시야가 가려졌다. 그래도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소년은 조금 서둘렀다.

그게 지나쳤던 걸까. 얼마 가지 못해 소년은 장애물과 부딪혀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짐이 모조리 쏟아져 길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맨 위에 올려놓았던 탐스런 토마토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누군가의 발에 의해 허무하게 짓뭉개지는 것을 소년은 똑똑히 보았다.

이게 뭐야?

남자의 성난 음성이 시끄럽게 울렸다. 소년은 그제서야 자신이 멍하니 흐물거리는 토마토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토마토를 밟은 발의 주인이 척 보기에도 화려한 옷차림을 한 신분 높은 귀족이라는 사실도.

뭐야, 이 거지 꼬맹이는?

남자는 씩씩대며 더러워진 바짓단을 내려다 보았다가 바로 옆에 넘어진 소년에게로 화난 시선을 던졌다. 사실 남자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올레이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몸짓이나 목소리, 그리고 가면 속에 엿보이는 눈빛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 죄송합니다!

소년은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귀족은 화를 누그러뜨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거센 발길질에 걷어차인 소년은 뒤로 몇 바퀴는 굴러갔다. 신음 소리를 내뱉을 새도 없이 소년은 얼른 일어서 다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사죄와 복종의 표현을 곧바로 보이지 않으면 더 심한 일을 당한다. 소년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어 온 일상이므로.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거지 같은 게

귀족은 분이 덜 풀렸는지 더욱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소년에게로 다가왔다. 그래도 소년은 피하지 못했다. 피하면 안 된다. 바닥에 머리를 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하시지요, 기슬린 후작.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소년은 앞을 볼 수 없었으나, 귀족의 움직임이 그 목소리에 멈추었음을 알 수 있었다.

…….

뭘 그리 당황하시나요. 설마 가면을 썼다고 당신을 못 알아보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요, 기슬린? 방금 전 모임에서 저희 아버지에게 창피를 당한 화가 아직 안 풀린 것은 이해하겠으나,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는 꼴은 정말이지 보기가 흉하군요. 더 이상 시선이 집중되기 전에 이만 돌아가시기를 강력히 권하는 바입니다, 기슬린 후작.

귀족이 당황하여 말문이 막힌 것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되었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리면서 저 귀족의 이름으로 짐작되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서 조금씩 오르내리는 것이 들렸다. 귀족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신음인지 욕설인지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뱉고는 자리를 떴다.

소년은 주위의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끼어들어 자신을 도와준 낯선 인물의 모습을 처음으로 눈에 담았다.

소년은 무척이나 놀랐다. 놀랐다기보다 뜻밖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우아하고 차분한 말투로, 그러나 단호한 무게감을 잃지 않으며 품위 있게 상대방을 압도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어쩐지 조금 앳된 목소리라는 생각을 했지만서도 설마 이렇게까지 어릴 줄은 몰랐다.

괜찮냐고 물으려 했는데, 형식적인 인사라고 해도 그건 실례일 것 같네.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소녀가 말했다. 소녀는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일어설 수 있어?

소년은 멍하니 소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부드럽고 고운 손이었다. 서고 보니 몸집도 생각보다 작았다. 앉아 있었을 땐 위압감이 넘치는 분위기 탓인가 키도 커 보였는데, 실제로는 소년보다 약간 작은 키였다.

“……괜찮으면, 이 손 놔줄래.

소년은 그제야 한참 동안이나 손을 놓지 않고 멍하니 소녀의 얼굴만 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뺐다.

, , 미안저기, , 고맙습니다?

소년은 당황스러워 하면서 다급하게 인사를 했다. 조금 혼란스럽긴 했지만 어찌 됐든 상대는 소년보다 높은 신분임이 분명했다. 단정하게 정돈되어 윤기가 도는 까만 긴 머리, 하얗고 고운 손, 우아하고 품위 있는 옷차림. 그녀도 어느 모로 보나 귀족이었다.

잠깐만. 그럼 나, 지금 귀족의 손을 잡은 거야?

소년의 가슴이 싸해졌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두려움이 차오르려는 동시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소녀 쪽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냈다.

“……, 피 난다.

? .

소년의 얼굴을 관찰하듯이 빤히 바라보던 소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서야 소년은 통증을 느끼고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소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따라와.

?

황망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소녀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어쩐지 그 말을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소녀는 곧장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더니 뭔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리고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소년은 손 위에 올려진 물건을 난생 처음 보는 것을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이건…….”

약이야. 사는 김에 붕대도 같이 샀어. 연고를 먼저 바르고 붕대 감으면 돼. 상처만 안 건드리면 금방 나을 거야.”

소년은 멍하게 눈을 껌뻑거렸다.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설마 내가 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니지?”

, 아니…….”

소년은 당황하면서 약을 열고 붕대를 풀었다. 허둥거리긴 했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손은 정확했다.

“……뭔가 능숙하네.”

소녀의 무심한 중얼거림을 들었지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빠른 손놀림으로 붕대의 매듭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소년은 손을 내리고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마워.”

소년이 웃으며 인사했다. 눈썹을 살짝 가릴 정도로 내려온 금색 앞머리 사이로 푸른 눈이 빛났다. 소녀는 잠시 그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

아까 그 남자는,” 소녀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올레이 귀족 중에서도 무례하고 상식 없기로 유명한 인간이야. 하필 타이밍이 안 좋았어. 바로 직전에 귀족 회의에서 비상식적이고 멍청한 소리를 해대는 통에 우리 아버지한테 망신을 당하고 나온 차였거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올레이와 주위 자유 연맹 도시를 비롯한 지방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테다스 전반의 일에 관해 토의하는 모임을 갖는다. 최초로 모임이 열렸을 때는 주로 테다스 정치 세력들이 국제적인 안건을 의논하는 대대적인 회의였으나 국가 및 도시들의 분열이 심각해지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지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이 모임은 주변 지방 귀족들의 사교 모임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최초 모임의 본질을 잊지 않은 귀족들도 아직 남아 있어, 그런 사람들은 한심한 소리를 아무렇게나 내뱉는 작자들과 같은 자리를 한다는 사실에 한탄을 하곤 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상태에서 하필 너랑 마주친 거지. 운이 나빴던 거야.”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탓은 아니잖아.”

소년이 말했다.

알아. 내 탓 아니지. 우리 아버지 탓도 아니고.”

소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쓸데없이 화풀이하는 꼴이 보기 싫잖아.”

소녀는 다시 시선을 들어올려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상처 안 남았으면 좋겠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유감이야. 그럼.”

? , 잠깐. 이건…….”

소년이 허둥대며 사용하고 남은 약을 내밀었다.

나한테 줘서 뭐하게. 그건 가져.”

하지만…….”

됐어.”

소녀는 손을 가볍게 내젓고는 등을 돌렸다.

잠깐만, 잠깐만!”

하지만 소년의 다급한 목소리에 발을 옮기지는 못했다. 소녀가 뒤돌았다.

? 미안한데 보상을 더 바라는 거라면.”

이름!”

소년은 거의 헐떡이듯이 말했다.

이름이 뭐야?”

?”

소녀의 회갈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무도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내 이름은 콜이야.”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소년이 자기 소개를 했다.

네 이름은 뭐야?”

해질녘의 바람이 소년의 짧은 금발을 스쳐 소녀의 긴 흑발을 건드렸다. 소녀는 완전히 모르는 존재를 처음 맞닥뜨린 것 같은 얼굴로 소년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에블린.” 이윽고 소녀의 입이 움직였다. “에블린 트레벨리안.”

소년의 파란 눈이 청명하게 빛났다.

에블린이구나.”

그의 머리색처럼 소년이 밝게 웃었다.

반가워, 에블린.”

…….”

소녀는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방금 전 노련하고 우아하던 귀족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는 어디 가고, 거기에 있는 것은 다만 또래 친구를 마주하는 게 어색한 어린 아이였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해.”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그럼, 저기, 또 볼 수 있을까?”

소년이 물었다.

난 여기 살지 않아. 우리집은 오스트윅이야. 이번에 회의 때문에 올레이까지 온 거고. 내일은 돌아갈 거야.”

…….”

소년이 실망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내년에.”

소녀가 중얼거리자, 소년이 퍼뜩 얼굴을 들었다.

내년 이맘때 또 귀족 모임이 열리면 다시 올 수도 있으니까, 괜찮으면, 그때…….”

!”

확연하게 높아진 소년의 목소리에 소녀가 놀란 얼굴을 했다.

또 보자, 에블린.”

소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얼굴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 ……또 봐, .”

해질녘 노을의 붉은 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내렸다.

 

소년의 마법 능력이 발현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음 해 소년의 행선지는 하얀 첨탑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

 

 

청년은 매끄럽게 움직이던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고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에 들린 것은 칼이었다.

?”

그는 의아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멈춰?”

청년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회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순한 호기심만 있었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떠올랐다. 인퀴지터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짧아졌지만 여전한 까만 머리카락, 부드러운 온기를 떠올리게 하는 회갈색 눈동자.

낯익은, 다정한, 반가운 얼굴.

난 콜이야.”

인퀴지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잔뜩 떠올라 있었다.

, . 안녕하세요…?”

나는…….”

청년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듯이 말했다.

내 이름은 콜이야.

나는 콜이야.”

네 이름은 뭐야?

에블린.”

에블린이구나.

반가워.”

반가워, 에블린.

 

콜은 언젠가 지었던 청명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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