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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뼈님] 정의에 대하여  - 핸더스



개럿 호크/앤더스 


시작하기 앞서 


양극성 장애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살 충동 등 트리거가 될 만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과서, 논문, 관련 서적, 가이드 등 여러 참고자료, 인터뷰, 관련 개인 경험을 기반으로 창작하였으나, 질환의 경험은 개인별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창작에는 부족하거나 곡해될 수 있는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하며 관련 지적이나 비평을 환영합니다. 





***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짙은 녹색 앞치마를 걸치고 팔짱을 낀 채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금발 머리는 뒤로 빗어 묶고, 피곤에 검푸르게 짓눌린 눈을 하고 있었다. 개럿 호크는 밤을 샐 카페인이 필요했다. 아메리카노에 에스프레소 샷을 셋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남자가 계산기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의외로 키가 컸다. 귀에는 금색 귀걸이가 반짝였다. 

“이름요?”

“호크.”

“테이크아웃?”

“네.”

가게를 나와서야 테이크아웃잔 뚜껑 위에 호크의 이름 대신 맹금류의 머리가 그려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이 매섭고 부리가 구부러진 것으로 봐서 호크hawk, 매였다. 커피가 지독하게 써서 호크는 정신이 좀 들었다. 

이틀 후 커피숍을 찾아가니 여전히 금발 남자가 있었고, 피곤에 찌든 표정도 그대로였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남자에게 호크는 말했다.  

“에스프레소 샷 둘요. 다음엔 새 머리 옆에 e도 써 줘요.” 

남자는 고개를 들어 호크를 처음으로 쳐다보았다. 면도한 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난 듯 턱에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럼 이름이 매hawk가 아니잖아요.”

퍼렐든 억양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아니에요.”

“무슨 별명인 줄 알았네.” 

“그게 더 쉬운지 매로 해 줘요.” 

“그건 안 되지.”

남자는 웃는지 웃지 않는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나온 커피 뚜껑 위에는 새 머리 그림과, e가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일까? 호크는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날에는 커피를 시키면서 테이크아웃잔이 아니라 머그에 시켰고, 커피숍의 얼룩에 찌든 소파 위에 앉아서 마셨다. 금발 바리스타는 입꼬리를 올린 채 그를 몇 번 바라보았는데, 비웃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호크는 잡지를 뒤적이고 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교대가 끝났는지 바리스타는 앞치마를 벗어놓고 나갔다. 

“안녕.”

그 인사도 자신에게 건넨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호크는 남자가 유리문을 밀고 나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횡단보도가 아닌 길을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건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몸을 돌리다가 그는 머그를 엎었다. 집어 올린 머그 밑에 새 머리 그림과 e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번 새는 호크와 똑같은 턱수염을 기른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젠장.”

몸을 돌려 뒤를 보니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세명의 하우스메이트와 공유하는 집의 비좁은 방 안에 앤더스는 용케 소파를 들여 놓았다. 소파에 앉아 맥주캔을 따는 앤더스의 배 위에 자리를 잡았다. 호크는 스웨터에 붙은 고양이털을 떼냈다. 뻣뻣했지만 앤더스의 머리와 비슷한 금발이었다.

“호크의 e는 묵음이지?”

“마음대로 해.”  

“날 앤더슨이라고 안 불러서 다행인데.” 

“이름이 특이하긴 해.”

“별 뜻 없어. 앤더펠스의 앤더스.” 

“앤더펠스 출신이야? 부모님께서 앤더펠스인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신 거야?”

 “아니, 내가 지었어. 엄마아빠가 히피였던 건 아니고. 그냥 앤더스라고 불러.” 

원래 이름을 묻는 건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평범한 데이트였다. 앤더스나 호크가 퇴근을 하고 나면 어스름이 내려앉는 공원을 산책하고 커튼을 치고서 영화를 봤고, 맥주를 마셨고, 팝콘을 먹고, 다음 할 말을 탐색했다. 

호크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앤더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네 번째 데이트에서 둘은 키스했다. 어둑한 방 안에서도 앤더스의 얼굴이 상기된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는 뒤로 기대앉으면서 머리를 묶었던 고무줄을 풀어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내렸다. TV 안에서는 사설 탐정인 주인공이 세 번째 시체를 발견하고 있었지만, 이미 첫 번째 희생자가 났을 때 호크와 앤더스는 영화의 전개보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터였다. 주인공이 걸친 베이지색 코트가 환한 빛을 내서 앤더스의 금발이 빛이 났다. 마치 한 올 한 올 다른 음색으로 울릴 것 같은 현처럼 내려와 있었다.


*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호크의 가족은 커크월로 이사를 왔다. 치료비로 거의 전재산을 쏟아 붓다시피 한 이후 어머니는 오래 소식이 끊겼던 친정에 가면 몸을 의탁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베서니와 카버도 커크월에서 대학을 가면 될 테고. 그러나 갬렌 삼촌은 자기 재산뿐만 아니라 리안드라 이름으로 남겨진 재산도 착실하게 갉아 먹은 후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 감정 기복이 심했던 어머니는 그 후 말수가 줄었다. 

“내가 이러자고 커크월에 너희를 데려온 게 아닌데.”

어머니는 바닥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곰팡이가 핀 셋방의 벽지를 노려보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어머니의 첫 아침 일과가 화장대 앞에 앉아 은발이 된 머리를 빗어 땋아 올리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리안드라는 머리를 빗지도, 세수를 하지도 않았고 식사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세 자식이 달려들어 병원에 가자고 설득하는 데만 닷새가 족히 걸렸다. 

호크야 취직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근처 물류창고에서 상자 상하차로 시작해서, 창고가 옮겨가고 어머니와 더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작은 사무실에 사무직 일자리를 얻었다. 밤에는 바텐더 일을 하다가, 어머니 옆에 붙어 있는 역할을 하는 베서니가 서서히 우울해 하는 것을 보고 재택 아르바이트를 알아보았다. 호크는 지인들과 함께 이삿짐 나르는 부업을 시작했고, 가끔은 사람들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교정했다. 대학원에 가겠다는 목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카버는 형과 함께 물류창고에서 일을 하다가 베서니와 같은 식당에 취직했다. 대학 학위가 없는 한 다른 일은 구하기 힘들었다. 야간에 할 수 있는 바텐더 일은 카버가 물려받았다. 그는 새벽에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소파에 누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들어가서 자라고 챙기는 건 호크의 몫이었는데, 동생은 그럴 때마다 벌컥 화를 냈다. 남동생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푸른 눈만이 아닌게 아닐까 하고 호크는 불안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

영화를 보자는 건 물론 처음부터 핑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크는 앤더스와 영화를 여러 편 보았다. 서로 더듬거나 잡담을 하느라 영화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점점 더 많아졌다. 소파 위에 결국 엉겨 있게 되자 앤더스가 침대로 가자고 제안했다. 

“내 하우스메이트들 오늘 밤엔 집에 안 오거든.” 

개럿 호크의 삶에서 가장 근사한 수시간이 이어졌다.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앤더스는 반쯤 몸을 일으켜 호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크가 앤더스의 얼굴을 쓰다듬자 앤더스는 웃었지만 호크의 손을 잡아 내렸다. 

“호크. 이건 네가 알아야 할 거 같은데.”

“방금 전 침대에 빈대가 있었다는 얘기만 아니면 되는데.” 

“나 양극성 장애로 치료받고 있거든.” 

“음.”

호크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후 천천히 말했다.  

“우리 어머니도 지금 우울증이야.” 

“양극성 장애는 우울증이랑 많이 달라. 잘못하면 너 어머니 수발들면서 남자친구 수발도 드는 경우가 있으니까 생각해 보라는 거야.” 

“이렇게 근사한 밤 이후로?”

앤더스는 힘없이 웃었다. 

앤더스는 침대 위에서 먹는 것을 질색했는데, 그 날은 감자칩을 뜯었다.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칩 조각이 이불과 시트 위로 흩어졌다. 바삭바삭하면서 몸과 시트 사이에서 가시처럼 피부를 찔렀다. 

“마법사 청소년을 위한 시설에는 절대 입소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나를 차에 실어다 밤에 고속도로 갓길에다 세 번 버리고 갔어.”

“음.”

“옛날 같으면 포승줄로 묶어다가 마탑에 집어넣었겠지. 다행히 그 작자가 친권 포기를 해서 그룹홈에 갔는데, 뭐, 나쁘진 않았어. 세 번인가 가출했지만.” 

엄마는 앤더스를 보내면서 많이 울었다.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용서를 구했다. 앤더스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엄마에게 말했다. 

“용서할게. 엄마 곧 올 거지?”

엄마가 챙겨준 가방 안에는 옷가지와 앤더스가 가장 좋아하던 책과 앤더스의 이름을 수놓은 베개 커버가 들어 있었다. 

그룹홈에서 앤더스는 엄마를 기다렸다. 주말에 그는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았다. 한번은 엄마에게서 그룹홈의 관리인의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건강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언제 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엄마도 오지 않았다. 용서가 그런 뜻이었나 보다고 앤더스는 생각했다. 앤더스는 베개 커버를 접어서 서랍장에 집어넣고, 축구를 했다. 

앤더스는 쾌활해서 인기가 많았다. 가끔 그는 너무 까불었다.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그는 그룹홈의 친구들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맞서 때리기도 했다. 불안할 때는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겨우 고쳤다. 그는 언제나 성적이 좋았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 목표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날은 그는 온 몸이 에너지로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잠은 세 시간을 채 못 잤지만 기분이 좋았다. 애인인 칼이 주말에 해변에 가자고 했고, 지금 전공은 둘인데 세 개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장과 상담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의대와 동시에 티빈터의 연극학교에 진학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고속열차가 있으니까 아마 오가면서 수업을 들으면 되겠지. 미래는 선명한 색으로 다채롭게 물들어 있었다. 거대한 가능성이 색색의 풍선처럼 사방에 떠다니고 있어서 손만 내밀면 그 부유하는 표면을 쓰다듬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강의 시간에 앤더스는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손을 들고서 먼저 오늘의 강의 주제에 대해 물었고, 그 다음에는 그에 대해 스스로 반론을 제기했고, 어느새 인간의 뇌와 광케이블에 대해 손짓을 해 가며 열변을 토했다. 

교수는 눈썹을 찌푸린 채 앤더스를 주시하며 듣고 있었다. 

“수업 끝나고 잠깐 남아요.” 

짤막한 대화가 끝나고 나서 교수는 심리상담센터에 예약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 심리상담센터에서는 병원에 약속을 잡아 주었다. 진단은 금방 나왔다. 양극성 장애였다. 

치료약 중 리튬의 부작용 중 가장 흔한 것은 체중 증가였다. 앤더스는 살이 붙을까봐 며칠간 스포츠 음료 외에는 아무 것도 섭취하지 않았다. 한번 빈혈로 쓰러진 후 그는 저지방 우유와 에너지바를 먹으며 시험기간을 버텼다. 약에 적응하는 동안 그는 대개 멍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적응한 후에도 가슴을 내리누르는 듯한, 공허한 안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앤더스는 책을 펼치고 나서는 단어 하나 하나를 진창을 걷는 사람처럼 헤쳐 나갔다. 예전에는 과제로 나온 책뿐만 아니라 교수가 추천한 책도 모두 읽었지만, 이제는 한 페이지를 읽는 것도 고역이었다. 토론에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만 세상이 천천히, 녹슨 톱니바퀴처럼 돌아갔고, 사람들의 발언과 시선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앤더스는 예전이, 칼날 위라도 기꺼이 걸을 수 있던 불안정한 에너지로 가득했던 예전이 차라리 그리워졌다. 그는 약을 먹지 않았다. 3주 후 그는 확신에 차서 전 재산을 손세정제를 대량으로 구매하는데 투자했다. 그 확신에 찬 기간이 지나가자 앤더스는 방의 마룻바닥부터 침대까지 가득한 손세정제 박스와 텅 빈 통장을 발견했다. 종말에 대한 열망이 정신을 좀먹었다. 창밖을 보니 주유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트럭 밑에 깔려 두개골에서 발가락 뼈까지 통쾌한 소리를 내며 온 몸이 으스러지는 기분을 상상했다. 새벽 2시, 그는 고속도로까지 걸어가 갓길에 앉아 나가서 지나가는 트럭과 버스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의사를 지망하는 학생으로서 일관적인 자살충동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앤더스는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응급실에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살을 시도한 학생이라는 사실이 의료기록에 남으면 혹시나 향후 의학대학원 진학을 가로막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현실이 더 무서웠고, 그는 잠시 울었다. 칼에게 전화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칼의 차는 고장이었다. 칼은 제설이 안 되어 눈이 질척이는 갓길을 1시간 남짓 걸어 앤더스가 앉아 있는 지점까지 왔다. 칼은 계속 30초 간격으로 “괜찮지? 괜찮지?” 하고 확인했다. 칼은 시퍼렇게 언 채로 앤더스 앞에 나타났다. 

“앤더스, 괜찮지?”

“괜찮아.”

앤더스는 말했다. 

떨어지는 성적을 붙잡고 간신히 졸업했지만, 의대는 적어도 당분간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

칼에 대해 앤더스는 “헤어졌어.” 라고만 했다. 칼이 앤더스가 졸업하고 난지 얼마 안 되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얘기는 호크가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왜 얘기 안 했어?”

앤더스는 손을 깍지 끼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어.”

호크는 더 묻지 않았다. 


*

호크는 웹사이트를 뒤져서 양극성 장애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증상과 치료법과 평소 생활 관리법에 대해서도 읽었다. 다른 병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질환이 없는 사람과 별 다르지 않게 원하던 직업을 얻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도서관에 가서도 관련 책을 빌렸다. 이론으로 가득한 책을 꾸역꾸역 읽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병세에 시달렸던 이들이 쓴 에세이집도 같이 빌려왔다. 

어쨌거나 앤더스와의 관계는 어쨌든 호크의 예전 연애와 별 다르지 않았다. 호크는 퇴근하고 나면 앤더스가 일하는 가게로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껑충하게 큰 키에 싱글벙글 웃고 손님들의 주문이나 인사에 약간 냉소적인 농담으로 화답하는 금발 바리스타는 인기가 좋았다. 앤더스가 앞치마를 벗고 교대를 할 때부터 한 시간 정도 데이트를 할 시간이 있었다. 

호크는 베서니에게 앤더스를 먼저 소개했다. 베서니가 마법사라고 호크가 말을 꺼내려 하자 베서니가 가로막았다. 

“오빠,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베서니는 커피잔 안에서 티스푼을 빼냈다. 티슈로 닦아서 식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천천히 티스푼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앤더스는 웃음기 섞인 눈으로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가 쳐다보는 가운데 티스푼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숟갈 부분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물 흐르듯 뒤로 젖혀졌다. 앤더스는 스푼을 집어 들고서는 한 두번 돌려보았다. 

“각도가 약간 비뚤어진 거 같지만, 급여가 좀 짜니까 이건 복수라고 하지 뭐.” 

베서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베서니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빨 닮은 거 같아.”

호크는 웃었다. 

“아버지랑은 좀 다른 사람이지.”

앤더스는 마법사 청소년의 시설 강제 입소를 반대했다. 마법사를 혈마법사로 묘사하는 미디어에도 화를 냈다. 그는 마법에 대한 전면적인 수용과 마법사 권익 향상을 요구하는 웹사이트에 기고했다. 과거에 비해 노골적인 탄압은 줄어들었고 마법 자체를 실용적으로 활용하자는 움직임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편견은 잔존했다. 어쨌든 통제 불가능한 위험인구였다. 마법사 시설 입소 기록이 밝혀지면 취업이 취소되거나, 특정 업계 진출이 막히곤 했다. 

아버지 맬컴 호크는 그룹홈에서 자라 자기 아이는 절대 시설에 입소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었다. 베서니에게도 일찍부터 마력을 통제하는 법을 가르쳤다. 호크가 기억하기에 아버지는 한 번도 시위에 나가거나 앤더스처럼 웹진에 투고하지 않았다. 그는 바비큐 그릴에 불을 피우거나 잼 뚜껑을 열거나 카버의 발바닥 물집을 터뜨리기 위한 바늘을 소독할 때 마법을 사용했다. 

“실용적인 기술이 있으니 좋지.” 

사소하고 소박한 힘. 호크는 부엌에 갔다가 베서니가 아버지와 함께 촛불을 손짓으로 켰다 껐다 하면서 숨죽여 웃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힘을 나눈 이들만이 만들어낸 작은 세계였다. 카버가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했을 거란 생각은 최근에야 들었다. 

아버지의 췌장에 악성 종양이 발견됐을 때, 그 마법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지만.  

호크는 아직 카버에게 앤더스를 소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카버는 요사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TV를 틀어놓고 잤다. 매트리스로 가서 자라고 하면 동생은 으르렁거리며 손을 쳐냈다. 


*

앤더스는 주말마다 유기동물 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고양이와 개가 가장 많았지만 새부터 새끼 악어까지 별별 동물이 다 들어온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앤더스는 항상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어했다. 그는 다리에 꼬리를 감아오는 모든 고양이에게 애칭을 붙였다. 

TV에는 두번째 영화가 지나가고 있었다. 앤더스나 호크나 스크린에는 신경을 쏟지 않은지오래였다. 호크는 속옷을 찾아 입고 (룸메이트를 만날지 모르니까) 어슬렁 어슬렁 부엌에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소파에 자세를 고쳐 앉은 앤더스는 리모콘을 보고 있었다. 호크는 앤더스 옆에 굳이 비좁게 웅크리고 누웠다. 

앤더스가 입을 열었다. 

“그룹홈에는 파운슬롯경이라는 고양이가 있었는데-” 

호크는 머리를 앤더스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이밀었다. 

“앤더스 네가 잘 때마다 이렇게 파고들었지.”

앤더스는 킬킬 웃었다. 

“집만 크면 다섯 마리쯤 키우지 뭐.” 

호크는 연인의 짙은 호박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갈색 눈의 치즈 태비가 좋겠군.

“내 사랑, 커크월 주택 시장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전혀 모르지.” 


*

세탁기 탈수기능이 고장 났다. 호크와 카버는 물이 입구까지 차오른 세탁기 안에서 척척하게 물을 먹어 무거워진 빨랫감을 건져냈다. 빨래바구니를 들고서 근처 빨래방까지 갔지만, 주머니를 뒤져보니 동전이 부족했다. 카버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호크는 벽을 발로 찰까 하다가 다시 바구니를 들고 걸어왔다. 

“개럿!” 

호크는 발길을 멈추었다. 감렌 삼촌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주차장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조카를 발견하자 그는 “개럿!”하고 소리쳐 불렀다. 호크는 반응하지 않고는 감렌을 지나쳐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빨래 왜 다시 갖고 와?”

“밖에 봐.”

덧문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 카버는 이를 악물었다. 

“씨발, 저 새끼가 어딜 들어오려고.” 

뒤축 닳은 신발을 끄는 소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개럿, 잠깐만. 잠깐만 좀 얘기하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돈 빌려달란 얘기 아니야.” 

호크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좋은 말할 때 가십쇼.”

“숨겨달란 얘기도 아냐. 좋은 소식이 있으니까 누나랑 얘기 좀 하자.”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지금 여기 저랑 카버밖에 없어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카버가 부엌 창문 커튼을 슬쩍 들추었다. 감렌은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누나한텐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말은 중얼거림으로 잦아들었다. 다시 커튼을 들춰보니 어슬렁거리며 돌아가는 감렌의 뒷모습이 보였다. 


*

감렌이 리안드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리안드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말했다. 

“너희들에게 외사촌이 있단다.”

“시팔 가지가지하네.” 

“카버.” 

어머니는 한 숨 돌렸다. 

“예전에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헤어진 후에 딸을 낳은 모양이지. 아무튼 전 여자친구하고는 최근 들어 연락하다가 이번에 집을 합친다고 한다. 난 좀 믿기 어렵지만, 감렌이 취직도 했단다.”

카버와 호크는 시선을 교환했다. 

“여자분한테 친척과 인간의 도리로써 감렌 삼촌이랑 합가는 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할 거 같은데요.” 

“그거야 우리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지. 그리고 그 딸은...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네 나이야, 개럿.” 

“분유값 달란 소리는 안 하겠네.” 

카버는 의외로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

감렌은 그 후 잠잠했다.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는 일어나서 산책을 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카버도 기분이 약간 나아져서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호크는 사무실에서 집에 있을 어머니를 걱정하는 대신 모니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주 토요일에는 온 가족이 근처 공원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장성한 세 자식들이 리안드라를 그네에 태우고 밀었다. (“내가 혼자 탈 수 있어.”라면서도 어머니는 깔깔 웃었다.) 쌀쌀한 4월 아침이었다. 

“상황이 나아지는 거 같아.” 

호크의 사무실 앞까지 다 쓰러져가는 차를 몰고 온 앤더스에게 말했다. 범퍼에는 메이지 언더그라운드의 스티커가 얼룩덜룩하게 붙어 있었다. 

“외사촌이랑은 다다음주에 잠깐 만나기로 했어. 적어도 돈 나가는 구멍 하나는 줄었으면 좋겠는데.”

“상황이 나아지긴 하겠네.”  

호크는 약간 충동적으로 말했다. 

“앤더스, 나중에 상황이 정말 나아지면 나랑 같이 살래?” 

호크는 앤더스가 농담으로 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앤더스는 핸들 위에 양 손을 올리고 호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진심이야?”

“진심인데.”

“내 사랑. 내 친구도 같이 가야 하는데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누구?”

“내 양극성 장애?” 

앤더스는 기어를 바꾸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그는 앞의 길을 주시하면서 흘끗 호크를 보았다. 개럿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목시계의 버클을 풀었다가 다시 잠갔다. 

“앤더스, 우리 이 얘기 이미 한 것 같아. 그리고 나는 괜찮다고 했고, 책도 읽고 있고 더 공부할거야. 오히려 내가 곁에 있는 게 너에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

앤더스는 앞의 길을 노려보았다. 

“지금이야 내가 안정된 상태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붉은 등이 켜진 신호등 앞에 차는 천천히 멈추었다. 정지선 바로 전이었다. 앤더스는 운전을 잘했다. 그는 한 손을 핸들 위에 올리고, 마치 광고에 나오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차를 몰았다. 말도 안 되게 비좁은 주차공간에도 매끄럽게 차를 밀어 넣었다. 

호크는 이정도로 통제에 능한 사람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직 믿을 수가 없었다. 

시내 샌드위치 가게 뒤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저녁을 먹었다. 근처 농구장에서 공이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어차피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놈이니 이름을 붙이자고 생각해봤어.” 

“그거 약간 끔찍한데. 이름을 붙이면 애착이 생기잖아?”

앤더스는 포장지를 접었다. 

“어차피 헤어질 수 없는 친구라면 애착이 있는 게 낫겠지.” 

“그래서 이름이 뭔데?”

“저스티스Justice.” 

호크는 앤더스는 삼각형으로 접은 포장지를 바깥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때까지 기다렸다.  

“왜 하필 저스티스야?”

“나한테는 가장 정의에 가까운 존재니까. 내가 갖고 태어난 원죄에 대한 하늘에서 내려온 신벌 같은 거지.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어. 이해가 안돼. 멀쩡했던 내가 왜 하필 대학교 신입생일 때 발병을 한 거지? 왜 뇌는 그 지랄을 하기로 결정했을까? 난 탄 고기를 먹지도 않고, 담배도 안 피웠고, 술도 적당히 마셨고, 매일 운동하고 불평 없이 채소를 먹었고, 개같은 놈들은 몇 팼지만 정당방위였고,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단 말야. 그런데 어느 순간 벼락처럼 이 벌이 내려온 거지. 머리 안에 추적자가 도사려서 하루 종일 쫓기고 있는 것 같은 병이 말이야.” 

앤더스는 좌석 등받이 레버를 당겨 뒤로 젖혔다. 

“호크. 호들갑 떨고 싶진 않은데 세상에 만약 운명이 있다면 이게 운명이야.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없어. 약을 챙겨먹고 스스로 상태를 관찰하고 병원을 다니는 거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호크는 앤더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싶었다. 경직된 얇은 입술에 키스를 하면서 어쨌거나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아플 때는 내가 같이 있을 거라고 위험한 약속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앤더스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 오롯한 고독을 침범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앤더스, 넌 몸이 아픈 거야. 치료 받고 관리를 잘 하면 된다고.” 

“정신적 당뇨라고 나도 가끔은 생각하는데, 당뇨는 인간의 성격을 바꾸거나 미래를 이정도로 박살내진 않지. 마지막 삽화는 일년 전이었어. 유지가 잘 되는건지 아니면 다음 삽화가 오는 건지는 난 몰라.” 

개럿은 연인의 손을 잡았다. 앤더스는 호크가 잡은 손을 뺐다. 

“나랑 저스티스는 한 몸이야. 분리할 수 없어. 이 병과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야. 그걸 알아야 해, 개럿. 넌 그걸 알아야 해.” 


*

호크는 이후 앤더스가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활기나, 침잠하는 듯한 침묵이 병의 증세가 아닌가 생각했다. 앤더스는 아주 다른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앤더스가 그런 성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앤더스의 청소년 시절을 알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골 아플 정도로 쾌활하고 농담 많고 에너지가 넘쳤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의 앤더스는 퇴근 후 가끔 팔짱을 끼고, 고양이를 안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앤더스의 사금파리 같은 재치와 활기 밑에는 명석하고 단정한 인간이 있었다.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도 커피잔을 마치 실험도구를 세척하듯이 씻어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무엇이든 이해해야만 했다. 그는 인과관계를 믿었다. 세상에는 선하든 악하든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간에 패턴이 있었고, 그 이해를 토대로 변화가 가능하다 믿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발현한 마력이 그에게서 집을 앗아갔다. 가족 중 누군가 분명 마법사가 있었겠거니 생각했지만 이미 가족과는 연이 끊겨 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아무도 입에 담지 않는 본명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이번에 느닷없이 닥쳐온 병은 반드시 이해해야만 했다. 두 번 실패할 수는 없었다. 앤더스가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에는 아마 그런 믿음이 있을 것이다. 

모두를 구하리라, 그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리라. 


*

어머니는 지역센터에 일자리를 얻었다. 시작하는 날은 일주일 후였다. 어머니는 자축하겠다면서 퍼렐든식으로 생선을 구웠고(“너희 입맛은 친탁이야”), 카버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거대한 타르트를 사왔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할 때쯤 어머니가 말했다. 

“네 삼촌이 집에 놀러와서 주말 지내고 가라더라.”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너희가 감렌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안다만, 나도 조카를 보고 싶어.”

“삼촌은 우리를 봐서 즐거운 기색이 전혀 아니었는데요.” 

“너희는 커크월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잖니. 외사촌이랑 서로 알게 돼도 좋겠지.” 

“타르트 사왔으니까, 난 여기서 빼 줘요. 알겠지?” 

카버는 의자 다리가 들려 기우뚱할 정도로 등받이에 등을 깊이 기댔다. 얼굴에 공격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개럿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머니 혼자 가긴 그렇잖아요.” 

“나 혼자 가도 돼.” 

베서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갈 수 있어요.” 

여동생의 접시 위에서 포크가 계속 달그락거렸다. 베서니가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스트레스 받을 거 없어, 베서니. 내가 갈게.” 

호크는 눈 밑을 눌렀다. 


*

“앤더스.”

“응.”

“나 등신 같은 우리 삼촌 집에서 이틀 정도 있을 예정인데.”

“응.”

“같이 갈래? 소개 시켜줄게.”  

앤더스는 볼펜 끝을 씹었다. 호크가 팔짱을 끼고 답을 기다리자, 앤더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심이야? 진심이면 심각하게 고려해 볼게.”

“아니.” 

“그럴 줄 알았지, 내 사랑.” 

앤더스는 일어나서 호크의 양 뺨을 감싸 안고, 이마를 맞댔다. 뒤로 당겨 묶은 머리칼이 빠져나와 호크의 얼굴을 기분좋게 간질였다. 

요즘은 기분이 좀 나아졌나 보다고 호크는 생각했다. 

“나도 일 있어. 주말부터 의학대학원 시험 공부할거야. 강의 끊었어. 이번에 시험 보려고.” 

이전에도 앤더스는 진학에 대한 얘기는 몇 번 했었다. 이번에 시험을 보기는 너무 이른게 아닌가 싶었지만 호크는 중립적인 답을 골랐다. 

“잘했네.”


*

커피숍에 갔지만 바쁘게 오가는 바리스타 셋 중 누구도 앤더스가 아니었다. 호크를 알아본 40대 여성 직원이 오히려 질문을 했다. 

“앤더스 어디 갔는지 알아요?”

“오늘 안 나왔어요?”

“전화 안 받던데요.”

호크는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들리고 사서함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안 받네요.”

키가 껑충하게 큰 남자 바리스타가 말했다. 

“걔 어제 좀 이상했는데.”

여성 직원이 돌아보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호크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앤더스의 룸메이트 하나가 문을 열었다.  

“네 애인 이틀간 방에서 안 나왔어. 방해하지 말라던데.” 

앤더스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다. 티셔츠 차림의 연인이 두 팔을 벌렸고 그 다음에는 금발과 달아오른 얼굴과 까슬한 턱과 익숙한 체취가 밀려들었다.  눈 옆에서 광대, 코 위에 열렬한 키스가 꽂혔다.

“잘 갔다 왔어? 오늘 올 줄 알았지. 그랬으면 정리했을텐데 네가 시간을 안 알려줬어.” 

“앤더스…. 너 핸드폰 꺼져 있더라.”

호크는 앤더스에게 끌어안긴 채로 곁눈질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바닥에는 온통 펼쳐진 책과 종이투성이였고, 생수병 여럿과 찌그러진 우유팩 하나가 굴렀다. 

“사촌은 만났어? 감렌이랑 별로 안 닮아야 할 텐데. 네 삼촌 같은 인간이랑 살아주는 분딸이라면 물론 반 정도는 천사겠지. 핸드폰은 저절로 꺼졌어. 꺼지게 내버려두지 뭐.” 

다시 뺨에 키스가 꽂혔다. 호크는 앤더스의 입술에 응했지만 아연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네?”

“당연하지!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는 기분인데. 거기다 너도 왔고.” 

앤더스는 잽싸게 몸을 돌려 무거운 책에 발가락을 찧을 뻔 했다. 호크는 몸을 굽혀 책을 덮었다. 유기화학이었다. 

“직장에서 걱정하더라. 왜 그렇게 공부 중이야?”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뭘 그렇게 물어봐.”

앤더스의 눈은 확신에 반짝이고 있었다. 

“시험 볼 거야?”

“돈도 이미 냈는데.” 

뱃속을 누군가 꽉 붙들고 물에 적신 걸레처럼 쥐어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시감에 가까웠다. 부엌 테이블 앞에 앉은 아버지가 호크와 카버와 베서니를 앉혀 놓고 입을 벌리던 순간. 

“앤더스. 너 혹시 약은 잘 챙겨 먹어?”

앤더스의 얼굴에 처음 놀람이 떠올랐다. 그 다음 그의 미간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개럿 호크, 네가 우리 엄마야?”

“앤더스.”  

“네가 내 의사야? 내가 의대 준비를 했는데 그것도 모를 것 같아?” 

호크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바닥에 흩어진 책과 종이를 걷어차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주웠다. 

“난 괜찮아. 이 파도를 잘 타기만 하면 해낼 수 있는게 많으니까. 약 바꾸고 나서 제대로할 수 있는게 있어야지. 그 멍청한 의사새끼 자기가 약 먹어본 적도 없는데 뭘 알아. 되는 대로 이거 저거 처방하다가 내가 덜 멍청해지고 좀 괜찮은 거 같다 싶으면 얼른 잘됐다 싶어서 계속 먹으라고 하는 거지. 이번에 내가 하루에 책을 몇 권을 읽었는데. 어쨌든 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이번에는 뭐 해낼 수 있어. 이번 시험만 치르고 나서, 그 다음부터 다시 약 먹을 거야.” 

호크는 종이를 떨어뜨렸다. 

“약을 안 먹었다고? 앤더스, 약을 안 먹었어?”

앤더스는 입을 꽉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앤더스, 며칠이나 안 먹었어?” 

“신경 꺼.” 

앤더스는 캐비닛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약병과 세안도구를 정리해 놓은 캐비닛이었다. 

호크는 앤더스에게 애원했다.

“나 좀 볼게.”

“개럿 호크, 정신 차려.” 

“비켜.”

 “왜 날 못 믿어? 사랑한다면서? 언제부터 날 감시해도 된다고 내가 그랬어? 네가 뭔데 선을 넘어?”

“제발, 제발 비켜.” 

앤더스는 폭발했다. 

“네가 대체 뭘 알아 너는 나아가고 있잖아 모두들 다 잘만 나아가고 있는데 왜 나는 안 돼 왜 왜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나는 왜 저 엿 같은 커피숍 구석에서 하루 종일 커피나 내리냐고.” 

“용서는 나중에 해 줘. 제발 비켜줘.”

앤더스는 물러섰다. 

호크는 캐비닛을 열었다. 약병이 여럿 있었다. 투명한 주황색 약병에는 4주 전 날짜가 박혀 있었는데, 알약으로 가득했다. 호크는 손바닥 위에 약을 쏟았다. 일부는 세면대 위로 조약돌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약을 한 알 한 알 세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고 자꾸 숫자를 놓쳐서 나중엔 소리내서 세야 했다.

스물 여섯 알.  

 “앤더스, 너 괜찮아?”

앤더스는 침대에 앉아 대꾸하지 않았다.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매듭이 풀려 흘러내린 막처럼 보였다. 

“너 마지막으로 밥은 언제 챙겨 먹었어?”

앤더스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흔들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 다시 깍지를 꼈다가 손가락을 꺾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풀기를 반복했다. 난폭할 정도로 빨랐다. 

“앤더스.”

“씨발 자꾸 그러면 죽고 싶으니까 그만 해.” 

“앤더스, 병원에 가자.” 

앤더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죽고 싶어.”

“일단 가 보자.”

“차 키.”

앤더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차 키. 내 침대 옆에 있어.” 

차 열쇠는 침대 사이드테이블 위, 쿠키통 안에 클립과 집게와 다른 열쇠와 함께 섞여 있었다. 작은 열쇠가 달린 열쇠고리는 엄지손가락만한, 다 갈라진 플라스틱 액자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앤더스와 호크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물에 젖었는지 가장자리는 온통 번져 있었다. 다만 앤더스는 지금보다 머리가 짧았다. 훨씬 짧았다. 호크는 다시 한 번 보았다. 검은 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호크가 아니었다. 칼이었다. 


*

응급실 침대에 걸터앉은 앤더스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가 건넨 인사에 간호사들이 웃었다. 주치의와 그는 익숙하게 악수를 했다. 커튼을 치고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호크는 침대에서 한두걸음 물러섰다. 그는 소독약 냄새를 맡으면서 벽에 걸린 점묘법 정물화와 옅은 녹색 커튼을 바라보았다. 

“호크.”

앤더스가 불렀다. 의사는 차트를 든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 

호크는 커튼을 젖히고 침대 옆에 앉았다. 앤더스는 손을 내밀었다. 퍼런 핏줄이 설 만큼 야위어 있었다. 아니면 형광등 불빛 때문이든가. 

인조가죽 위에 종이 커버를 씌운 침대는 삐걱거렸다. 호크는 앤더스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감쌌다. 커피를 내리고, 계산기를 경쾌한 리듬으로 두드리고, 호크의 뺨을 쓰다듬고, 밤 늦게까지 기고문을 쓰고, 겁먹은 고양이를 익숙하게 들어올리고, 분노할 때마다 허공을 그러쥐듯 움직이는, 뜨겁고 길고 성마른 손.  

“나 괜찮아.”

호크는 몸을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앤더스의 머릿속에서 저스티스는 끊임없이 선전포고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현재에, 미래에, 세계에, 그 자신에. 이 침대는 끊임없이 싸우던 앤더스가 안팎으로 쫓기면서 찾아낸 피난처였다. 호크가 결코 알 수 없는, 앤더스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세계였다. 가장 순수하게 응집된 정의에 가까운 공간이. 

앤더스는 호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마치 용서를 하는 사람처럼, 또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처럼. 어느 쪽인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호크, 난 괜찮아.”

“응.”

“괜찮아.” 

“응.”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도 괜찮아.”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너 몰골이 말이 아닌데. 너야말로 뭐 먹었어?”

옆머리와 광대 위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호크는 잠깐 눈을 감았다. 

“아니.”

“개럿 호크, 병원 건너에 가게가 있으니 샌드위치를 사와.”

“분부대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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