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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루트님] Coloured-펜호크

일러스트 엠모님 커미션


드래곤 에이지 2 

2막->3막으로 넘어가는 펜리스 개인 퀘스트 스포일러 있음

펜리스*호크(마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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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호크를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펜리스 인생 대부분 동안 마법사라는 존재는 언제 어떤 식으로 자신의 목을 옥죄어올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호크의 손끝에서 푸른 빛이 가늘게 뻗어 나가 적들의 몸을 날카롭게 꿰어 버릴 때, 펜리스는 자신의 몸에 새겨지던 문신의 감각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들 대부분에게서 나오는 잠깐의 호의는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감정 기복이 심했고, 그것이 권력으로 치부되던 국가에서 그에 따른 결과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직 그들 발밑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자들 몫이었다.


펜리스는 애써 마법사에게 도망쳐 먼 곳까지 도달했고, 이제 그 사슬을 아주 끊어버리려는 참이었다. 때문에 다시 그 덫에 스스로 기어들어 가 목을 내어놓는 일만큼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


펜리스는 호크와 다니며 저도 모르게 마치 누가 자신을 공격이라도 한 것처럼 굴어댔다. 마법사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등허리에 불이 타는 것 같은 고통으로 할퀴어진 상처의 기억이 채 사라지지 않은 날들이었다. 장소도, 사람도, 밟고 있는 땅의 온도마저도 다른 도시에서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들은 일부는 의도치 않은 것이었고, 일부는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펜리스는 말을 던지고 나서 찾아오는 잠시간의 침묵 시간 속에서 습관처럼 자신도 모르게 목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펜리스는 온몸에 각인된 기억을 떨쳐내려 애를 썼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꼿꼿이 서 있다가 부질없이 부러져나간 수많은 이름 없는 소유물들에서 보아왔던 반항의 결과물들은 커크월에선 단지 환영에 그치고 말았음에도.


펜리스가 그렇게 날 선 반응을 할 때마다 호크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린 채 펜리스의 적대감을 가볍게 받아치곤 했다.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유머였고, 이따금 진심으로 화를 냈지만 그 밑에는 신기하고 낯선 사냥감을 찾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펜리스는 각인된 감각과 다른 반응들을 처음엔 믿지 않았고,(물론 실없이 웃긴 했다.) 그다음에는 자신의 짐작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려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앞에 마법사가 있는데 매번 마법에 대한 화제가 튀어나올 때 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호크는 집요하게 마법에 관한 화제를 따져 물었고 펜리스는 기다려왔다는 듯 누군가 억누르기라도 했던 말들을 쏟아내듯이 토해대곤 했다.


"누구든 힘이 주어지면 똑같은 짓을 할 거야. 당연한 최후지."


도망치던 혈마법사를 호크의 눈앞에서 쓰러트릴 때마다 펜리스는 꼭 그런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 이야기를 서른 번쯤 들었을 때, 호크는 팔짱을 끼고 삐딱한 자세로 펜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굳이 너도 똑같은 마법사잖아. 같은 구질구질한 말은 이제 더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 둘 사이엔 이거 말고 더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


정신을 차려보니 등록하지 않은 마법사가 셋이나 함께였다. 한 명은 기이한 정의에 목메달고 있고, 한 명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호크는 지팡이를 크게 휘두르며 위협적인 마법들을 쏘아 댄다. 싸울 때는 날카로운 마법으로 마치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주변을 베어 넘겼고, 얼굴에 튀는 피를 아랑곳하지 않고 닦아 내었다. 그리고나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실없는 유머를 하며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곤 했다. 호크가 던져대는 유머나 눈웃음은 처음에는 모든 동료를 향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누구라도 알 법한 어떤 의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에 맞지조차 않는 뻔할 만큼 뻔한 낯간지러운 멘트들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낯선 땅에 머무르게 된 이방인들에게 일종의 공감대를 만들어주곤 했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기에 호크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펜리스는 처음에는 자신이 알던 감각이 부정당하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받고 싶어 했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다음에는 호크를 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호크는 펜리스를 집요하게도 쫓아다녔다. 굳이 앤더스의 선언문을 펜리스의 발치에 밀어 넣는다던가, 드네리어스의 와인 창고를 제집 드나들 듯하며 이번엔 이걸 마셔 보자고 꼬셨다. 


어느새 둘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펜리스의 찌푸린 표정과 아직도 보이는 날선 반응들은 이제 더는 호크에게 어떠한 심경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은 펜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호크의 손 끝에서 나오는 푸른 빛은 새겨지던 문신의 감각을 더이상 불러일으키지도 않았고, 둘이 언쟁을 할 때도 등허리에 불타는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같은 마법사 동료들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이라는 사소하게 거슬리는 점을 제외하면, 펜리스는 호크와 있을 때 악몽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일도, 식은땀으로 몸이 젖어 밤새워 뒤척이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원했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호크의 손끝은 마법사의 손이었으나 연인의 손이었고 펜리스는 마치 그동안 부정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움직였다. 

 

***


기억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아슬아슬한 발걸음을 옮기며 살아왔다. 펜리스에게 절대자에 대한 순종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전부와 다름없었던 절대자의 배가 자신을 모래사장에 남기고 떠나기 전까지는, 펜리스의 세계는 그것이 전부였다.


안개 전사들과 함깨 하던 시간 동안 생전 처음 느꼈던 감각들은 밀물이 몰려오듯 턱끝까지 차올랐다가 소중한 물건을 찾기 위해 배가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마른 바닥을 드러냈다. 그때 느꼈던 생경한 감정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펜리스는 돌아오는 배 위에서 피범벅이 된 옷을 하나둘 벗으며 깨달았다. 펜리스는 감정의 바다 속에서 한동안 떠오르지 못했다. 그 날 밤 펜리스는 자신의 입 안쪽을 피가 나도록 씹었다. 겉으로 난 생채기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 주인이 매우 언짢아했으니까.


애써 빠져나왔다 생각했던 밀려드는 기억의 파도는 도망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펜리스는 순식간에 자신이 수많은 손길에 빠져 숨이 막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허우적거리던 펜리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마리안의 입술이 평소처럼 움직였다. 호크의 가벼운 목소리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말투는 자신을 빠르게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펜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헌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한가? 


영민한 리토, 가족들의 시선, 자부심을 느끼던 자신의 모습, 고통과 속박. 파도는 곧 시커먼 바다가 되어 펜리스를 잠식했다. 펜리스는 정신없이 감정과 기억에 휩쓸려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펜리스는 자신의 저택에 있었다. 자신의 손목에 매인 붉은 천이 눈에 들어왔다. 저택은 장막 같은 검은 침묵 속에 있었고 그 한복판에서 펜리스는 호크와 자신의 관계가 끝났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확신보다는 미련이 더 길었다. 


한동안 펜리스는 호크를 피했다. 호크와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 날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 걸었다. 이제 펜리스는 혈마법사를 쓰러트리고 습관처럼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베릭을 포함한 다른 동료들이 정말 쟤들 되게 볼만하지 않냐며 어깨너머로 내기를 거는 소리도 들려왔다. 펜리스에게 대상화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유쾌한 익숙함은 아니었기에 그런 날은 펜리스는 더 호크를 피해 다녔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뒤통수에 호크의 눈빛이 꽂히는 것 같았다. 호크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이면 모든 이들에게 평소와 같이 농담을 건네곤 했었다. 다만 이제 집요하게 펜리스를 향해 짖궃은 농담을 던지는 일은 더는 없었다. 


둘의 공간은 그렇게 한동안 분리되었다.


그러기를 삼 년쯤 되자 펜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호크와 대화하는 것 대신 새벽 일찍 아멜가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하이타운의 도시는 지나치게 잿빛이다. 찬 공기가 펜리스의 입 밖으로 나오며 희미하게 흩어진다. 해가 뜨기 시작해 푸르스름한 공기가 아직 남아있을 때쯤이면 펜리스는 말없이 아멜 저택의 2층 창문을 멀리서 바라봤다. 이따금 일찍 일어나 집을 정리하고 있는 보단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보단은 목례를 하고 지나갈 뿐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기에 그는 산책을 한결 편한 기분으로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행동이 십여 일 이상 지속되면, 보단이 자신의 주인에게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것이란 사실을 미련에 질질 끌려가던 펜리스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운을 입은 채로 호크가 저택의 입구로 나왔을 때, 펜리스는 갈 곳을 잃은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릴 수밖에 없었다. 준비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잠깐 눈을 마주치고, 평소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녔을 때처럼 시선을 흐리고, 그리고는 마치 원래 지나가는 길이었다는 식의 말을 흘렸다.


 호크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펜리스를 바라봤다. 둘의 눈이 잠시 길게 마주쳤다. 호크는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호크는 한동안 그 상태로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있었고, 펜리스도 시선의 방향을 어찌할지 몰라 하다가 주변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기로 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야, 펜리스는 습관처럼 동여매던 자신의 손목에 매인 붉은 리본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제야 펜리스는 호크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친 이후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귀 끝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


그날 밤, 이사벨라와 배에 관한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다. 이사벨라는 펜리스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사벨라는 한 손으로 호크의 어깨를 툭 쳤다. 둘의 시선이 잠시 마주치는 것 같았다. 호크도 이사벨라에게 펜리스는 모를 눈짓을 했다.


 마법사는 변덕스럽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펜리스는 그들의 변덕스러움을 더 강하게 느꼈다. 펜리스는 자신이 부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해왔고 보란 듯이 행동해왔다. 그럴 때마다 호크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최악의 결과를 늘 비껴가며 보여주곤 했다. 돌이키기에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바로잡으려면 처음에 바로잡았어야 했다.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스스로 이유를 깨닫는데도 긴 시간이 걸렸다. 미련으로 보일 수 행동들이었고 적절치 못한 행동들이었다. 펜리스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마음속으로 짙은 후회를 하고 있을 때, 호크는 익숙하게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호크의 입이 열리고, 그동안의 자신을 책망하거나 저주하는 대답이 나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제 말할 준비가 된 것 같아서 찾아왔어."


호크는 자신이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마치 지금처럼. 펜리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에 매인 붉은 리본을 보고 마치 뭔가 들키기라도 한 것마냥 황급하게 손을 내려놓았다. 그런 펜리스의 행동을 보고, 호크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호크는 항상 농담하기 전에 저런 표정을 짓는다. 잠시 시간이 몇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농담은 살짝 그립기까지 했었기에 펜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고 호크는 그 한숨을 오해라도 했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면 더 기다릴 수 있어. 어차피 시간은 많잖아?"


지겹도록 도망치기만 한 삶이었다. 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그러고만 있었다. 펜리스는 호크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 연습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가 되었다. 함께 하고 싶다고. 너 없는 삶은 결딜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펜리스는 처음 버려졌던 그 바다를 생각했다. 안개 전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호크의 푸른 눈동자는 그때의 바다와도 같았다. 


펜리스는 이제 알고 있다. 자신의 감정 속에서 휩쓸리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임을. 긴 망설임과 방황 끝에 결국 펜리스의 입이 열렸다. 호크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는 듯 했다. 곧 펜리스의 낡은 저택에 희미하게 색이 돌아올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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