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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님]No Rest for the Wicked - 핸더스


  당신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홀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뒤늦게 되뇌였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나는 당신을 끝내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고독했던 매 순간들과, 그를 유일하게 이겨낼 수 있게 한 강인함까지도, 나는 당신의 존재를 이루는 그 모든 것을 차마 가늠할 수 없었기 떄문이다. 그럼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한 쌍이었다. 그대의 가장 견고한 애정 그리고 가장 뜨거운 증오까지도 오롯이 나는 응당 내가 치러야 할 몫으로 받아내었고, 종내에는 그 양극의 온도에 모두 익숙해지고 말았다. 안녕, 당신을 사랑했어요. 목구멍 밑에서 뜨겁게 차올랐으나 이내 내 비겁함을 넘기지 못하고 식어버린 그 짧은 문장. 끝 어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신의 숨은 꺼지고 말겠지. 나를 때로는 원망스럽게, 때로는 타오르듯 쳐다보던 담갈색 눈이 빛을 잃고 난 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나는 뒤척이며 깨어난 새벽이면 언제나 자연스럽게 당신의 온도를 찾아 팔을 뻗을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면 당신은 지나가듯 과거의 일을 띄엄띄엄 단편적으로, 하지만 조금은 그리운 듯이 나에게 털어놓곤 하였다. 나는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늘 그렇군요, 라며 으레 듣고 있다는 의사 표시만을 할 뿐이었다. 어쩌면 나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은 일방적인 고해였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담아두고 있기가 못내 괴로워서 흘러 넘친 이야기들이었다. 마탑에서 있었던 일들, 워든들과 경험했던 일들, 고단했으나 어리고 용감했던 과거의 일을 풀어놓고도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당신이 좀 더 꾹 눌러왔던 과거의 순간까지도 탐닉할 수 있었다. 안더펠스의 작열하는 날씨, 그리고 몰래 밥을 챙겨주는 어린 당신을 용케 알아보고 무릎에 다정하게 몸을 비벼오던 이웃 고양이. 아, 정말 귀여웠어요. 아직도 생각이 나요. 흰 양말을 신은 검은 고양이었는데, 배가 부르면 내 손에 기대 골골대는 소리를 냈죠. 그런 즐거웠던, 하지만 너무도 짧았던 기억들에는 항상 조금은 긴 듯한 침묵이 곁들여지곤 했다. 그렇게 당신이 말을 잇지 못할 때마다 나는 그것이 마치 어떤 신호라도 되는 양, 그저 당신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오르내리는 어깨를 잠깐 쓸어내려주었다. 매끄러운 적갈색 머리칼을 내 투박한 손가락에 장난치듯 감아 올리고 나면 그대는 마침내 탄식하고 말았다. 호크, 당신의 다정함이 나를 죽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끝내 가장 저변에 있는 두려움, 그리고 내가 정복할 수 없었던 그리움에 대해서는 털어놓지 못했다. 나의 서투른 애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앤더스, 나는 널 너무도 잘 알아. 네가 포기하지 않을 걸 알았어. 템플러의 꼭두각시로 사느니 당당한 마법사로 죽겠다고 말한 그 자의 고고함 그리고 초월적인 신뢰에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괴로워했을테지. 결코 해갈되지 못할, 서슬 퍼런 그리움에 덜덜 떨리는 몸으로 제 신념을 비참하게 곱씹어보았겠지. 그리고 쓰디 쓴 약을 삼키듯, 느릿느릿 선언문을 적어내려갔을 터다. 가장 마지막 온점을 찍은 잉크가 마른지 한참 후에도 동요가 가라앉지 않은 바람에, 그제서야 당신은 자존심을 굽히고 그맘때엔 깊이 잠들었을 나를 남몰래 떠올렸을 것이다. 밤이면 내 몸이 당신을 갈구하며 아파해요. 언젠가 토해내듯 은밀하게 쏟아낸 말 그리고 그것에 녹진하게 배어든 정념에 오히려 놀란 것은 당신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대는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나를 혐오한다 말했다.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혐오스러운 나를 사랑해버리고 마는 자신이 싫다고도 말했다. 그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내 목을 조르다가도 결국엔 나에게 입을 맞추겠지. 나는 너의 고독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너를 내 곁에 둘 것이라는 것만큼은 교활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암투에 서투른 내가 너의 모순된 감정을 놓고 관계의 끝을 점쳐보곤 했다. 네가 떠나가지 않도록, 연정과 증오를 오가는 변덕을 나는 모두 기꺼이 맞아들였다. 나를 마음껏 미워하고 갈망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나를 깊이 경멸하는 입술과는 달리 내 팔을 밀어내지 못하는 몸을 마치 용서라도 하는 척, 꼭 감싸안아버리는 것이 바로 나의 간사함이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뒤틀린 한 쌍이었다. 네 속내를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이따금 감히 너의 꿈을 꾸었다. 너를 생각하며 진정으로 아파하는 것은 바로 내 몸이었다. 꿈 속에 나타난 너는 늘 내 팔아귀를 뿌리치고 품 속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잠깐의 투쟁을 끝으로 나를 벗어난 너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섬광, 광염. 네가 팔을 뻗어 내 얼굴을 감싼다. 덥수룩한 얼굴을 잠깐 연민하듯 쓰다듬고 매끄럽지 못한 목, 마디가 튀어나온 손가락이 내 목의 울대를 그러쥔다. 진료 때문인지 천성 혹은 오랜 단체 생활에서 들인 버릇 때문인지 네 손은 항상 단정했지. 날 놓아주지 않는 당신을 증오해. 그렇게 말하는 네 얼굴은 꿈 속이라할지언정 이슥한 두려움에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숨구멍을 옥죄어가는 손가락에도 나는 네가 그러하듯 네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 당신도 나를 사무치게 증오한다고 말해야해. 나를 죽일 거라고 말해야해. 너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것은 나의 미움보다는 침묵이었고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무의식 속에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치밀하고 계산적인 굴종 끝에 나는 항상 비겁하게 눈을 떠 버렸고 비참했던 너의 절규는 간 데 없었다. 그런 집착의 밤이 지나, 해가 뜨고 나면 나는 다시금 네 앞에서 간악을 부리는 것이었다. 마치 이 비뚤어진 애정의 무게가 온전히 너의 몫이라는 듯이.


  위대한 이상을 짊어진 당신은 나를 가지기 위한 욕심을 부리면서 너무도 괴로워했다. 관계의 끝이 다가오기 전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당신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늘 혼자였다고 내게 선언했었지. 그 외로움을 아주 잠깐 잊었을 뿐이라며. 아마도 그것은 당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악의 보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게 덧붙여진 말에서 나는 또다시 희미한 행복감을 느끼고 만다. 나를 비겁하다고 모욕하는 순간에도 나는 내가 욕망하는 네 모습만을 읽어내고 있었다. 내가 차마 헤아릴 수 없었던 완전한 고독을 너는 나로서 잊을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너는 괴로워하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연정을 고백했다. 아주 잠깐, 잊었을 뿐이에요.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결코 아주 잠깐이 아니었지만 드러내놓고 행복해할 수 있었던 시간은 그만큼 잠시였으므로. 당신은 그만큼 외로움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당신의 신념은 고작 거기까지로군요. 누구보다도 상처 입은 눈을 한 네가 내뱉은 대로였다. 나는 그렇게 얄팍한 인간이었다. 너는 곧장 등을 돌려 내 시선을 고집스럽게 피하였지만 그게 곧 내 존재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마주보지 않은 얼굴이 일그러졌을지, 분노하고 있을지, 그것도 아니면 울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내 목을 조르고 싶어하며 당신은 꿈에 찾아와 나를 괴롭혔지만 결국 나를 온전히 버리지 못해 숨통이 짓눌려진 것도 당신이었다. 


  나는 당신을 정말 온 힘을 다해 미워하고 사랑했다. 자유를 위해 죽음도 인내할 당신이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을 순간, 그 어떤 타협의 여지도 거부한 채 당신이 차갑게 그러나 담담하고 고결하게 쓰러졌던 그 순간은 나에게 영원과도 같았다. 시간의 흐름이 건조하기 그지 없었다. 어느 음유시인의 무용담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표현이지만 나는 그리도 낭만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숭고함을 꿈꾸었던 당신은 극악무도한 반역자의 서사를 가지게 되었다. 도시를 위협하는 자들의 피를 얼굴에 묻힌 채 나는 당신의 눈을 감겨줄 용기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런 나를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바라보지 않았다. 날 놓아주지 않는 당신을 증오해. 그래, 나는 너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네가 죽는 쪽을 택하였다. 안녕, 당신을 사랑했어요. 정직하고도 어리석었던 나의 연인.


  오늘 밤도 나는 네 꿈을 꿀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네가 나를 끝장내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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