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엘라나나나님] 페이드섹스 (솔라벨란)

로툰다는 오늘도 서늘한 그늘 속에 잠겨있었다.


커다란 공간에 슥슥, 붓질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3층까지 높게 트인 그 거대한 원형 공간은 원래 분주한 소음에 휩싸여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지금의 로툰다는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저 멀리 천장 부근에서 스파이마스터의 까마귀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소리도, 2층의 기록보관소에서 책장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인퀴지션 요원들의 말소리도 없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미세하게, 물감이 붓결을 따라 울퉁불퉁한 벽면에 덧발라지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라벨란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돌바닥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지지대 위에서 붓을 놀리고 있는 날렵한 엘프의 뒷모습 앞에 멈추었다.

그의 앞에 놓인 벽은 온통 푸른 물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드러난 손목의 일부와 붓을 쥔 손끝도 마찬가지였다. 벽화는 밑그림 위로 이제 막 대강의 바탕색 작업이 끝난 상태인 듯 했다. 아마 다음에는 금색이나 은색 염료로 테두리를 그려 넣거나 단순하고도 상징적인 패턴 장식을 추가하게 될 것이다.

솔라스가 그린 그림의 어떤 부분은 ‘누구나’ 알 수 있었고, 어떤 부분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화를 보자마자 그 안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또한 벽화가 인퀴지션과 인퀴지터의 행적, 그녀의 발자취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림 속에는 여전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색, 무늬, 형태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그저 ‘잊혀진 엘프의 것’이려니 여길 뿐이었다.

라벨란은 렐리아나가 벽화의 의미를 해석하고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길 계획을 세웠던 것을 기억해냈다. ‘엘프 문화’에 정통하거나 최소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기록담당자들이 판자에 끼워진 두루마리와 잉크가 잔뜩 묻은 펜을 들고 로툰다를 방문했다. 그들은 솔라스와 함께 꽤 긴 시간을 대화하고 오묘한 만족감을 얼굴에 띄운 채 물러갔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렐리아나가 받아든 보고서에는 정작 명쾌한 내용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벽화가 지닌 수수께끼에 대한 거의 모든 질문은 의미심장하지만 모호한 대답으로 채워져 있었다. 렐리아나는 결국 그 프로젝트를 무기한 보류했는데, 그것은 그냥 포기가 아니었다.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평소처럼 본 뜻을 감추고 자기만의 영역을 지키려한 엘프 이단마법사 – 인퀴지션의 중요한 일원인 – 의 의지를 존중하겠다는 의사 표시와도 같았다.


로툰다를 찾은 라벨란은 평소와는 다르게 빈 손이 아니었다. 오늘 라벨란의 손에는 한 장의 문서가 들려있었고, 그것이 그녀가 솔라스를 찾아온 이유였다.

라벨란은 문서를 가로로 눕혀 들고 지금 막 완성되어가고 있는 벽화가 끝나는 부분에 대어보았다. 문서 위에는 그녀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기호가 적혀 있었는데, 이렇게 멀찍이 두고 보니 그것은 솔라스의 벽화 위에 새겨진 무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보이기도 했다. 솔라스가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때 문득 라벨란은 붓질 소리가 멈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문서에서 시선을 돌리자, 걷어 올렸던 소매를 잡아 내리고 있는 솔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베난,”


로툰다에 짧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단어가 울렸다.



*


“이것은 분명히 쿤의 수학 공식이군요.”


미처 지워지지 않은 푸른 물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손가락을 턱에 댄 채 솔라스가 말했다. 솔라스는 라벨란에게서 건네받은 문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겨울 궁전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은밀하게 챙겨온 정보들 중 하나로, 렐리아나의 첩보력이나 죠세핀의 인맥으로도 도저히 용도와 정체를 밝혀낼 수 없었던 서류였다. 라벨란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솔라스는 단번에 문서의 내용에 큰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쿤의 연구물은 테다스에서는 대개 가틀록 제조 공식일 수 있다는 의심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왠지 이 문서는 그런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순수하게 학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군요.”


라벨란은 오직 리드미컬하게 구부러지고 뻗어가는, 마치 드레스나 조각품의 테두리 장식처럼 보이는 선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알지 못하는 먼 타국이나 고대의 문자를 떠올리게 했으나 그것과는 또 달랐다. 문서의 기호들은 훨씬 더 함축적이고 정교한 진리를 감춘 채 마치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부터라도 수학 공부를 해봐야 할까봐요.”


라벨란의 말에 솔라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마치 한 장의 종이가 아닌 돌로 만들어진 조각품을 대하듯, 주의 깊게 문서의 표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것이 오를레 황궁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정말 의미심장하군요. 하지만 인퀴지션의 인력으로는 이 내용을 해석할 수 없을 테고, 문서의 출처와 입수 방법을 생각해보면 이것을 대학의 학자들에게 위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군요.”


라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죠세핀과 렐리아나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페이드를 이용해 보면 어떨까요?”


라벨란의 입에서 ‘페이드’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언제나처럼 솔라스의 기색이 바뀌었다. 그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라벨란은 이후의 말에 정신을 바짝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솔라스와의 대화가 종종 그렇듯 대답해야할 질문들과 적절한 타이밍에 묻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설명들이 이어질 수 있으리라. 이런 예감이 왜 라벨란의 귓가를 발갛게 달구고 그녀의 커다란 눈을 한층 빛나게 만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이용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솔라스는 치밀어 오르는 흥미를 감춘 듯한 주의 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첫 번째 질문에 그녀는 이미 준비해온 대답이 있었고, 덕분에 다행하게도 담담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신이 예전에 페이드에서의 경험과 스피릿들과의 만남을 통해 수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었잖아요. 인퀴지션에는 오를레 대학만큼의 재원은 없지만, 어쩌면 페이드는 대학보다 훨씬 유용한 지식의 보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라벨란의 말을 들은 솔라스의 표정은 미묘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라벨란은 잠깐 동안 약간 초조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고민은 길지 않았고,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옳은 말이군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페이드를 좀 더 복잡하지만 효율적으로 이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의 끄트머리로 갈수록 솔라스의 목소리가 약간의 흥분과 기대감으로 살짝 들뜨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질문을 할 차례였다.


“더 복잡하지만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게 뭐죠?”


라벨란의 질문에 솔라스의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잡혔다. 보다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그녀의 물음에 솔라스가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끼지 않은 적은 없었다.


“페이드에 존재하는 스피릿들의 지혜를 빌어 필요한 정보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 문서 자체와 페이드의 속성을 보다 본격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기본적으로 페이드는 현실의 ‘장소’에 깃든 기억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깃드는 장소의 물리적 경계는 언제나 불확실한 점이 있습니다. 토대만 남은 성벽과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에 예전 거주자들의 기억이 남아있는 한편, 건물을 이루던 벽돌 한 개를 따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로운 에너지와 기억이 이동할 때도 있죠.”


라벨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하지만 그런 ‘장소’와 그 문서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솔라스가 문서를 든 손을 일부러 움직이자 종이가 팔랑, 하고 가볍게 움직였다.


“단지 얇고,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작다고 해서 이것이 기억이 깃든 ‘장소’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베난.”


그가 한층 다정하게 말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의 말이 불러일으킨 호기심과 흥미로 라벨란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라벨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페이드는 현실의 모든 ‘사물’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어떤 면에서는 당신의 말이 맞고, 어떤 면에서는 아닙니다. 페이드와 현실의 연결에서 장소가 중요한 이유는 두 세계가 기본적으로 공간적인 개념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죠. 즉 양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우리의 언어가 이후의 사고와 접근법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요.”


솔라스는 언제나 최대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는 편이었지만, 라벨란을 상대로 할 때에는 평소보다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는 편이기도 했다. 그것은 듣는 이, 그리고 배우는 이로서의 그녀를 신뢰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듣고 있던 라벨란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고, 그녀의 반응을 눈치 챈 솔라스가 다시 그들의 문제로 화제를 돌리려는 듯 가벼운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어쨌든 중요한건 우리가 이 문서를 페이드를 이용해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 문서를 그것을 쓴 이, 읽은 이들의 기억과 지식이 밀도 높게 교차하는 장소로 보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추상적인 영역인지라 웬만한 이들은 페이드에서 이 양상을 추적할 엄두를 낼 수 없을 테죠.”


라벨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저는 쿤의 수학 연구에 대해서는 거의 지식이 없는데요. 전혀 모르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니 상상조차 되지 않는군요.”


“좋은 지적입니다.”


솔라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해’의 의미를 협소하게 정의할 필요는 없겠죠. 우리는 이것이 쿤의 수학 연구를 담고 있다는 것, 오를레의 겨울 궁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 그리고 인퀴지션에 잠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져올 수 있는지 그 가능성들을 알고 있습니다. 인퀴지션과 당신에겐 문서 자체의 내용보다 그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 정보들이죠. 그리고 문서를 이해하려는 목적과 닿아있는 것들이기도 하구요.”


라벨란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솔라스처럼 한쪽 손을 턱 밑에 갖다 대며 말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써진 공식이 바이라니온의 정리와 연결될 수 있는지, 또는 얼마나 우아한 수학적 역설을 담고 있는지를 알 필요는 없다는 거군요. 페이드는 우리의 목적에 맞는 방식으로 문서의 내용을 보여줄 테고요.”


라벨란의 말에 솔라스의 눈이 놀란 듯 약간 커졌다가 곧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베난, 당신이 쿤의 수학 연구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 되겠군요. 문서에 깃든 당신의 기억이 페이드에 반영된 모습에 한층 기대가 되는데요.”


라벨란도 미소 지었다. 그녀는 솔라스가 방금 전의 대화를 통해 즐거움을 얻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녀에게도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명백한 지식과 경험의 격차가 있지만, 서로의 지성을 존중하며 주어진 주제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것. 그 과정은 유용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무엇보다 솔라스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발견하고 그 정교함에 감탄하는 한편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찾는 것이다. 때로 대화의 합은 너무나 잘 맞아 떨어져 라벨란과 솔라스 모두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곤 했다.


라벨란이 솔라스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모처럼 같이 페이드에 가게 될 것 같은데 기대되는 모습이 그것 밖에는 없나요?”


솔라스의 고개가 살짝 라벨란을 향해 기울어졌다.


“당신에게 제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을 ‘보게 될까’보다는 무엇을 ‘하게 될까’에 가깝겠죠.”


“그럼 당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한층 가까워진 라벨란의 눈이 솔라스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지금의 둘은 대화로 무르익은 친밀감과 미묘한 긴장감이 만들어낸 공간 속에 함께 묶여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솔라스의 눈빛은 강렬하고 흔들림이 없었음에도, 그 뒤에 있는 감정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내 그는 라벨란의 시선을 부드럽게 비켜가듯 몸을 돌려 로툰다 중앙의 테이블로 향했다. 자신이 원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느낀 라벨란은 약간 불만스러운 기분으로 팔짱을 끼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그는 평소보다 좀 더 라벨란에게 벽을 치는 듯 느껴졌다. 그런 라벨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솔라스는 실내를 밝히는 불빛 사이를 소리 없이 지나쳐 둔중한 나무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문서를 내려놓았다. 그의 흰 손가락이 테이블에 닿는 것을 보는 순간 라벨란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 감각은 이내 사라졌다.


“저는 문서 자체에 깃든 기억들과 당신의 의지를 토대로 페이드 안에 만들어진 공간으로 당신을 안내할 겁니다. 거기서 현실에서는 불가해한 기호로 표현된 지식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로 보게 될 수 있을 겁니다.”


‘페이드에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실로 정확한 대답이었지만, 라벨란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홀로 피식 헛웃음을 짓는 사이에 솔라스가 다시 라벨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한 쪽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거의 우아하게 보일정도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치 춤을 청하듯 손을 내밀고 솔라스가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라벨란은 약간 멍한 기분으로 솔라스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고, 그녀는 솔라스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조금 전에 느낀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 묻어있던 푸른 색 물감은 어느 사이엔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어느덧 둘은 어둡고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라벨란의 머리 위에는 진녹색 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은 듯한 페이드의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라벨란은 자신이 정말로 걷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길은 한결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뻗어있었고, 하늘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암흑 도시는 위치와 크기가 전혀 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곁에서 걷고 있는 솔라스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둘은 줄곧 한쪽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안정적이며, 바람처럼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라벨란은 문득 팔로 그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손쉽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충동이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길이 끝나고 눈앞에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그것은 한 눈에 형태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컸고 전체가 대리석으로만 이루어진 듯 눈부시게 흰 빛이었다. 특이하게도 평범한 창문이나 문으로 보이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고 건물 전면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로가 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파사드는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라벨란은 이내 그 조각에 온갖 양식들이 뒤범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니, 말 그대로 각각의 문화 속 이야기와 상징을 담은 조각품들이 한 번에 거대한 화로 속에 던져져서 반쯤 녹아 섞여지다가 끄집어내져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발몽 가의 황금 사자상과 창을 든 안드라스테의 석상, 클랜의 아라벨에 달려있는 엘가난의 상징, 아바르의 전사상과 두맛의 제단.. 하나하나 눈을 돌려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운 풍경이지만, 제대로 찾은 것 같군요.”


솔라스가 라벨란의 곁을 스쳐지나 앞으로 나아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벨란은 그가 순간 자신의 귓가에 속삭인 듯 느껴졌다.

라벨란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이게 페이드 안에 당신이 만든 것이라고요? 이런 것이 가능한가요?”


“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힘들었을 겁니다. 드리머(Dreamer)는 페이드의 공간을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고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악마들의 표적이 되곤 합니다만, 이 정도의 일은 당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라벨란이 덧붙였다.


“정확하게는 페이드 전문가 솔라스 당신과 제 손의 앵커 덕분에 가능한 일이겠죠.”


솔라스가 라벨란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더 정확하게는 인퀴지터인 당신과 당신을 돕기 위해 쓰이는 저의 능력이 한 일입니다.”


라벨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다른 어디도 아닌 인퀴지션만이 할 수 있는 일 인건 분명하네요.”


라벨란과 솔라스가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신기하게도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출입문이 갑자기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문에는 강인한 육체를 뽐내는 뿔 달린 생명체, 쿠나리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솔라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쿠나리의 한 쪽 뿔에 사슬로 연결된 고리를 잡고 잠깐 힘을 주었고, 곧 커다란 문이 어떤 삐걱거림도 없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건물의 내부는 어둡다고도 밝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페이드 전체를 흐르는 은은한 에메랄드 빛이 광원을 특정할 수 없게 공간 이곳저곳을 비추고 있었다. 언뜻 실내는 오래된 도서관같이도 보였다가, 혹은 그저 창고처럼도 보였고, 어쩌면 챈트리 예배당 같기도 했다. 그리고 중앙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라벨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문득 건물 전면의 조각들이나 내부의 풍경에 얼마만큼이나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솔라스는 페이드에 라벨란 자신의 의지와 목적이 반영된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와 함께 여기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일까? 쓸데없는 잡생각이나 감추고 싶은 것들이 드러나 버리면 어떡하지?

라벨란이 묘한 고민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옆에서 솔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은 당신 뿐 아니라 저와, 그 문서에 관련된 기억들 모두가 연관된 공간이니까요.”


라벨란은 뛸 듯이 놀랐다.


“제 생각을 읽은 건가요?”


“어떻게 보면요. 사실 이 공간은 페이드에서도 워낙 독특한 성격을 가진 곳이라..”


갑자기 말을 멈추고 솔라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시선을 발밑으로 떨어뜨렸다가, 복도 끝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공간은 물리적 장소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고와 개념, 기억의 연결을 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죠. 그 안에 들어선 이상 우리의 생각과 바람도 현실과는 다르게 강하게 연결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저는 전혀 못 느꼈어요.”


“제가 당신보다 페이드에서 머문 경험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제 말을 들었으니 아마 당신도 점차 다른 점을 느끼게 될 겁니다.”


라벨란이 그 문제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보려는 순간 좁고 길게 이어지던 복도가 끝나고 커다랗게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라벨란은 그곳이 스카이홀드의 로툰다와 너무도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훌쩍 높은 벽으로 이어지는 원형의 공간, 까마득한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과 알 수 없는 분주한 소음들, 벽면을 채우고 있는 색채들..

아니었다. 그 곳은 로툰다와 흡사한 공간이 아니었다. 바로 그 곳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그 로툰다’는 아니었다. 라벨란은 벽면을 채우고 있는 색채와 형상들이 솔라스의 벽화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좀 더 자세히 벽을 들여다보려는 라벨란의 시선은 무언가 허공을 떠다니고 있는 물체에 가로막혔는데, 그것들은 바로 알 수 없는 소음의 원인이기도 했다. 다양한 크기와 용도의 측량 기계들이 공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쿠나리, 오를레, 퍼렐던, 테빈터에 존재하는 모든 학자들이 저마다의 스타일로, 하지만 거의 같은 용도와 목적으로 사용할만한 도구들이었다. 길이를 재거나, 완벽한 원을 그리거나, 빗면의 각도를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정교하고 복잡한 물건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몇몇 기구 위에는 검은색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그림자가 부르르 뒤척이며 몸을 돌리자 깜빡이는 황금색 눈이 드러났다. 까마귀였다. 그것의 눈빛이 라벨란의 가슴 깊은 곳을 섬뜩하게 찔러왔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때로는 익숙한 곳에, 때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곳에. 공간의 곳곳에 산더미처럼 두루마리와 책이 쌓여있었고, 두루마리와 책으로 이루어진 탑의 곳곳에 다 타들어가는 촛불이 마치 눌어붙듯 달라붙어있었다. 촛불의 일렁이는 불빛은 장막 화염처럼 푸른색이었다.

압도된 라벨란이 미처 입을 열기 전에 솔라스의 숨죽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혹적이군요.”



*


라벨란은 천천히 중앙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평소 문서와 책 등으로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곤 했던 그 테이블이었다. 다만 페이드 안의 테이블 위는 거의 텅 비어있다는 것이 달랐다. ‘거의’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테이블의 가운데에 한 장의 문서, 바로 라벨란과 솔라스를 이곳까지 인도한 문제의 문서가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벨란은 문서를 집어 들었다.


“어째서 비어 있는 거죠?”


문서, 아니 그저 텅 빈 종이를 손에 들고 라벨란이 약간의 당혹감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솔라스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왔다. 라벨란은 그가 자신으로부터 문서를 건네받길 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좀 더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솔라스는 라벨란의 뒤에 서서 한쪽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살짝 짚고 어깨 너머로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라벨란은 등 뒤로 솔라스의 몸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가슴이 호흡과 함께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솔라스가 다른 한쪽 손을 라벨란의 가슴 앞으로 올려 그녀가 들고 있던 문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는 미끄러지듯 옆으로 물러났다. 라벨란의 허리에 가볍게 얹혀있던 손이 마지막까지 감겨 있다가 스르륵 그녀를 풀어주듯 멀어졌다.

라벨란은 돌연 한차례 뜨거운 열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솔라스는 한참을 손에 든 문서-백지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이것이 그 문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여기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하면 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원래는 한 장의 종이 안에 있던 것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솔라스의 말을 들었음에도 라벨란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되물으려는 순간, 그녀에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생각은 떠오른 것이라기보다 거의 물리적으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머릿속이라는 표현조차 적절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라벨란을 둘러싼 공기가 몸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오듯, 사방의 모든 것들이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던 라벨란의 시선이 벽면을 향했다. 저게 어떤 그림이었더라..? 그녀가 벽화로 다가가려 할 때, 흘깃 시야에 들어온 두루마리 속에 빼곡히 쓰인 단어 중 하나가 유독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것을 읽으려 하자, 귓가에서 갑자기 찰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라벨란의 아주 가까이에 기다란 측량 기계가 떠 있었다. 기계의 눈금은 무언가에 계속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것이 가리키는 숫자 중 하나를 읽어냈고, 그러자 입안에 돌연 어떤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몸을 뒤척이며 그 느낌을 털어내려는 순간, 발치에 있던 무언가가 걸음에 가볍게 튕겨나갔다.


라벨란은 몸을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주 작은 조약돌이었다. 돌은 손안에 착 감겨들듯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숲의 변방에서 주운 돌이었다. 평범하고 특색 없는 그저 하얀 조약돌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알았다. 키퍼의 엄격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홀로 숲 속을 배회하다 인간의 아이와 마주쳤을 때, 라벨란은 그를 위협해 내쫓는 대신 반나절 동안 함께 즐거운 놀이를 했다. 서로의 돌을 빼앗는 간단한 룰로 이루어진 게임은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시간도 약속하지 않는,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한 것이었다. 라벨란은 그의 돌과 자신의 돌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 손목을 어떻게 써서 상대의 돌을 원하는 방향으로 튕겨낼 수 있을지 궁리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게임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도, 그와의 우정조차도. 그저 손에 쥘 수 있는 단단한 조약돌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클랜이 다른 숲으로 이동할 때가 되었을 때, 라벨란은 그 조약돌을 짐 속에 챙겨 넣었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그녀는 솔라스의 말을 기억해냈다. ‘페이드의 공간은 우리의 목적과 의지에 맞는 모습으로 문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라벨란은 이 공간 자체가 오직 자신에 의해 읽혀질 수 있는 기호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정교한 지식을 품은 채 잠들어있는 불가해한 형태들이 아니었다. 단지 ‘상징적인 것’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길이 없는 ‘잊혀진 엘프의 것’도 아니었다. 항상 그 뒤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말없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알지 못했던 지식과, 그것을 만들어 내고, 필요로 했던 이들의 기억이 라벨란만의 기억과,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라벨란은 마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보이지 않는 물속으로 들어서듯 천천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이 몸 안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진짜가 아니군요.”


마침내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어떠십니까?”


라벨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솔라스가 물었다.


“무언가를.. 어떤 것을 알게 된다는 걸 몸 전체로 느낀 듯한 경험이었어요.”


솔라스의 입에서 ‘아...’ 하는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라벨란은 그의 눈에서 감탄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 당신과 앵커의 집중력은 대단하군요. 그토록 순간적으로 페이드 안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과 상호작용할 줄은.. 제게도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라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솔라스의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까 당신이 이 곳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이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했었죠?”


“...그렇습니다.”


라벨란은 솔라스와 아주 가까이 선 위치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한 쪽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뻗는 대신, 천천히 자신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을 빗어 넘긴 라벨란의 손가락이 목과 어깨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왔다. 뚜렷이 관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솔라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눈은 분명히 라벨란의 손과 그것이 매만지는 그녀 자신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

솔라스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라벨란이 앞으로 나아가며 양팔로 그의 목을 둘러왔다.

그녀는 솔라스에게 키스했다. 깊숙한 입맞춤이었다. 아주 잠깐 놀란 듯 몸이 굳었던 그도 이내 그녀의 움직임에 답해왔다. 라벨란은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허리와 등을 쓰다듬듯 감싸 쥐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입으로 솔라스의 혀와 강한 턱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둘 모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라벨란이 말했다.


“현실에서라면 몰랐겠지만, 여기에서는 당신도 읽을 수 있어요. 어떤 것을 바라는지, 생각하는지.”


솔라스의 눈이 페이드의 빛을 반사하며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라벨란은 다시 몸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말했다.


“그런 평온한 얼굴과 행동 밑으로 줄곧 ‘이런 것’을 느껴왔다니. 제가 본의 아니게 감추고픈 내면을 드러내어 당신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면 사과할게요.”


라벨란의 목소리가 짓궂게 울렸지만, 솔라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맞춰오는 그의 표정에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적어도 부끄러움은 없었다. 솔라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베난, 지금 당신에게 느껴지는 것이 저의 당혹감입니까?”


라벨란은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라벨란에게서 손을 떼고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양 손을 들어 목에 걸고 있는 늑대 뼈 목걸이를 머리 위로 벗어내었다. 예사롭게, 그리고 평소의 그처럼 침착한 동작으로. 그리고 그가 말했다.


“이 계획을 제안하고, 당신과 제 내면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게 저였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솔라스의 한쪽 손에 느슨하게 걸려있던 목걸이가 바닥에 떨어뜨려지며 툭,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그는 즉시 라벨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강하게 안았다. 라벨란은 다시 그에게 입 맞추기 시작했다. 솔라스는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양팔로 허벅지를 쥐고 그녀를 반쯤 안아 올렸다. 그리고 라벨란을 중앙의 테이블 쪽으로 조금씩 밀어붙였다.

라벨란이 테이블 위에 올라앉자, 입술을 뗀 솔라스가 그녀의 턱에서 목덜미로, 손가락을 부드럽게 옷자락 틈새에 집어넣어 드러낸 맨살 위에 입을 맞추었다. 라벨란은 작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젖혀 상기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놀라운 감각이었다. 이토록 분명하게 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는 것을, 상대로 하여금 열망과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때 라벨란의 시야에 문득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것은 공간의 높은 곳으로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라벨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아직 벽화 속에서 일렁이고 있는 형태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고개가 벽면을 향해 움직이자, 솔라스의 손가락이 라벨란의 턱을 잡았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리고 입을 맞추었다.


“여기서 너무 많은 것을 보지 마십시오, 베난.”


들릴 듯 말 듯 작은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가쁜 호흡이 실려 있었다. 라벨란이 대답하기 전에 솔라스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해 왔다. 이번에도 강한 감정이 쾌감과 함께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좀 전과는 조금 다른, 가슴 한복판을 뻐근하게 물들이는 묘한 비애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황홀한 감각이었다. 이 공간만을 위해 준비되어 온. 이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라벨란의 눈을 감겼다.



*


“무슨 뜻인지 다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렐리아나가 물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완벽했다. 일부만을 드러낸 붉은 머리카락이 빈틈없이 두건 밑으로 감춰져 있었고, 냉정한 눈빛과 다르게 혈색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언제나처럼 신중하다 못해 차가웠다. 렐리아나의 옆에는 아직 잠에서 살짝 덜 깬 듯한 죠세핀이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이른 티타임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동시에 동참을 권유했지만, 모두가 예의바르게 거절했다. 특히 솔라스의 거절은 그의 매너만큼 확실했다.

렐리아나와 죠세핀, 라벨란과 솔라스가 모여 있는 곳은 죠세핀의 집무실이었다. 렐리아나는 솔라스와 라벨란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기보다는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벨란이 문서의 원본을 들고 솔라스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 한지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연구는 가짜에요.”


라벨란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죠세핀이 되물었다.


“쿤의 것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아뇨. 쿤의 것이 맞아요. 하지만 그 내용은 진짜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언뜻 보기에는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일정한 실력을 갖춘 학자가 연구하면 수학적으로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실은 공식 전체의 의미를 무효화 시킬 정도의 모순을 품고 있어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죠.”


렐리아나는 복합적인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라벨란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라벨란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느냐부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그것이 겨울 궁전에 놓여있는 것인가에까지 걸쳐져 있었다. 평소처럼, 렐리아나는 좀 더 실용적인 문제부터 풀어가기로 결정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를레의 누군가에게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는 시간을 빼앗기 위해서죠.”


이번에는 솔라스가 대답했다.

“쿤의 수학 연구들은 언제나 잠정적으로 그들의 기술 문명과 연결될 수 있기에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이처럼 난해한 내용은 오를레 대학의 가장 뛰어난 학자가 시간을 들여 연구할만한 것으로 여겨지겠죠. 분명 오를레의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이 문서를 입수했을 것이고, 이것의 용도는 아마 대학과 여제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을 겁니다.”


렐리아나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학과 여제와의 관계에요? 영향이라면 어떤 식으로?”


렐리아나의 물음에 솔라스 대신, 차를 홀짝이며 문서의 수학 공식을 약간 질린 듯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던 죠세핀이 문득 대답했다.


“오를레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과 문화의 발전은 셀린느 여제가 가장 주력하고 있는 통치 방향 중 하나에요. 여제는 그것을 위해 몸소 대학을 개선시키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왔어요. 그런 와중에 만약 이런 거짓 연구물이 흘러 들어가면... 상황만 잘 조성된다면 대학 내부 뿐 아니라 대학과 여제 사이의 소통에 어느 정도 지장을 초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대학의 성취는 의문에 부쳐지거나 또는 여제의 불신을 사겠죠. 연구자는 잘못이 없음에도 부당한 책임을 지게 될 수 있구요.”


말을 마친 죠세핀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그저 하나의 연구물일 뿐이잖아요. 이것 하나가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을까요?”


렐리아나는 죠세핀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죠세핀의 손에서 문서를 받아들었다. 렐리아나는 새삼 그것이 얇은 한 장의 종잇조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주의 깊은 눈으로 문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치적 계략이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상대를 불리한 지점으로 몰아넣는 작은 수들로 이루어지기도 하죠.”


솔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 역시 신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이 가짜 연구물이 여제가 직접 추천했거나 여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학자에게 주어지게 된다면 어떨까요? 대학 내부에서 여제에게 반발하는 세력이 그 학자를 몰아낼 구실로 해당 연구를 핑계 삼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라스의 한쪽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 그 학자가 엘프라면? 여제는 오를레 대학의 문을 종족과 계층을 넘어 확장시켰는데 이러한 정책에 대한 반감과 이 문제가 연합해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렐리아나가 눈을 들어 솔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의문은 거의 사라진 듯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제까지 중 가장 분명하고 단호한 기세로 울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은 아니군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렐리아나는 라벨란과 솔라스를, 굳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숨기지 않고 바라보았다.


“‘가장 뛰어난 학자의 시간을 빼앗을 수 있는 가짜 연구’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에 인퀴지터와 당신은 단 하루가 걸렸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죠세핀의 집무실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렐리아나의 의혹이 담긴 차가운 눈빛과, 죠세핀의 호기심어린 표정과, 솔라스의 담담한 시선이 라벨란에게로 향했다. 라벨란은 눈을 한 바퀴 굴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게 바로 다른 어디도 아닌 인퀴지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


라벨란은 로툰다의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솔라스는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묵직하고 낡은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툰다는 평소처럼 크고 작은 소음에 휩싸여 있었고, 역시 서늘한 그늘 속에 잠겨 있었다.

라벨란은 책에 눈을 고정한 솔라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콧날과, 시선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눈꺼풀과 속눈썹을 바라보던 그녀가 문득 말했다.


“연구물의 내용은 가짜였지만, 그것이 만들어진 의도는 계략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솔라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라벨란을 바라보며, 그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럼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라벨란이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깍지 낀 손 위에 얼굴을 대며 말했다.


“시간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즐거움에 몰두하기 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어요. 최대한 공들여 만들어진 정교한 룰이 있는 게임 같은 거죠. 그것의 뒤나 앞에 놓인 것들과 분리될 수 있는 순간을 만들기 위한.”


라벨란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페이드 안에 만든 것도 그런 것이었나요?”


솔라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라벨란과 눈을 맞춘 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라벨란의 앞에서 그의 허리가 숙여졌고, 솔라스는 양 손을 들어 라벨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너무나 간절해서 손 안에서 절대 놓고 싶지 않은 것을 대하듯이.

솔라스가 물러났을 때 라벨란은 그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약간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단단했다. 손가락 끝은 아무 얼룩도 없이 희고 깨끗했다. 하지만 염료를 만들때 섞는 희미한 기름 냄새가 남아있었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